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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메모

서사의 위기 (한병철 지음) - 경험의 빈곤

by revival845 2023. 12.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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벤야민의 에세이 '경험과 빈곤(Erfahrung und Armut)'이 말하는 경험의 상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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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개념에 대하여 폭력비판을 위하여 초현실주의 외 | 발터 벤야민 - 교보문고

역사의 개념에 대하여 폭력비판을 위하여 초현실주의 외 | 발터 벤야민 사상의 진수를 선보이다전방위적 사상가 발터 벤야민의 텍스트를 번역한『발터 벤야민 선집』시리즈. 국내 벤야민 전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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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험이 상실된다. 다른 사람의 경험을 들으려 하지 않는다.

이야기를 듣지 않는다. 경험이 전승되지 않는다. 지혜의 연속성이 끊긴다.

 

다른 이의 경험을 구하지 않는다는 것은 그 이야기를 이어가려 하지 않는다는 것.

함께 이야기를 만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나의 이야기를 들려주지도 않는다.

 

이야기속에 담긴 지혜 대신 문제를 해결하는 기술을 찾아 헤맨다.

이야기 속에 담긴 지혜는 사라지고 생존에 필요한 기술만이 남는다.

지속적인 경험이 사라지고 남는 것은 오직 생존 뿐인 벌거벗은 삶이다. (그것에 가치가 있는가?)

 

이러한 근대에 대한 낙관은 새로운 '야만성'의 아름다움에서 찾을 수 있다.

경험의 빈곤은 야만인(생존뿐인 삶)을 어디로 데려가는가?

신 야만인은 전승의 맥락에 속해있지 않는다. 자기 자신을 추방시킨다.

결국 이어지는 진리가 아닌 현재의 삶을 '처음부터 시작하는'  법칙으로 구성하는 구성자로 자리한다.

 

이러한 신야만인의 존재는 인간의 현존재를 새롭게 하는 구원자로서까지 격상된다.

벤야민의 이 글은 경험의 상실에 대한 회의와 낙관적 아름다움에 대한 신봉 2가지의 자세를 모두 취한다.

그가 다시 이러한 근대를 회의하는 이유는 값비싼 유산을 현재의 동전과 맞바꾸는 경솔함 때문이다. (경제 위기와 전쟁)

그는 말한다. "우리는 빈곤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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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는 항상 비전을 가지고 있었다.
셰어바르트의 비전은 아름다움과 인간의 행복에 있다. 이 비전들은 미래를 매개하는 유리에 특별한 아우라를 부여한다.
진정한 미래 서사는 아우라를 뿜어낸다. 미래는 먼 것의 발현이기 때문이다.

 

근대는 진보에 대한 믿음,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기'의 역설, 그리고 혁명의 정신으로부터 영감을 받는다.
물려받은 질서에서 강경히 등 돌린 공산당선언도 미래 서사를 말한다.
이 선언에서는 '지금까지의 모든 사회적질서의 강제적 전복'을 주장한다. 그것은 도래할 사회에 대한 대서사다.


극작가 베르톨트 브레히트의 말을 빌리자면, 근대에는 격앙된 '초심자의 기분'이 만연했다.
새 시작을 위한 초기화 이후 이들은 '거대한 빈 서판' 위에서 '유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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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와 진보의 서사를 가지고 다른 삶의 형식을 향한 갈망을 품었던 근대와 달리, 후기 근대는 새로운 것 또한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기'에 해당하는 혁명적 파토스를 가지고 있지 않다.
따라서 후기 근대에는 출발 직전의 분위기가 없다.
'계속 그렇게 하기'와 대안 상실로 힘이 빠져 있다.
이야기할 용기, 세상을 바꾸는 서사를 향한 용기를 상실했다.

 

스토리텔링은 일차적으로 상업과 소비를 뜻한다. 스토리셀링으로서의 스토리텔링은 사회를 변화시킬 힘이 없다.
탈진한 후기 근대에는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기'가 강조된 '초심자의 기분'이 낯설다.
후기 근대인은 어떤 것도 '신봉'하지 않는다. 이들은 영원히 편히 쉴 곳만 찾는다.
어떠한 서사도 필요로 하지 않는 편리함 또는 좋아요에 예속된다.
후기 근대에는 어떠한 갈망도, 비전도, 먼 것도 빠져 있다.
따라서 후기 근대는 아우라가 없는 상태, 즉 미래가 없는 상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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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의 정보 쓰나미는 우리를 최신성에 도취된 상태로 추락시킴으로써 서사의 위기를 악화시킨다.
정보는 시간을 잘게 토막 낸다.

시간은 현재의 좁은 궤도로 단축된다. 여기에는 시간적 폭과 깊이가 없다.
'업데이트 강박'은 삶을 불안정하게 만든다.
과거는 더 이상 현재에 유효하지 않고, 미래는 최신의 것을 지속적으로 업데이트하며 그 폭이 좁아진다.
그래서 우리는 역사가 없는 채로 존재하게 된다.
이야기가 역사이기 때문이다.

분홍색-배경에-엄지-손가락-기호 (출처: unsplash.com)

 

응축된 시간인 경험뿐 아니라 도래할 시간인 미래 서사 모두 우리에게서 사라져 간다.
현시점에서 다음 현시점으로, 하나의 위기에서 다음 위기로, 하나의 문제에서 다음 문제로 아슬아슬하게 매달려 다니는 삶은 생존을 위해 마비된다.


문제 풀기에만 몰두하는 사람에게 미래는 없다. 서사만이 비로서 우리로 하여금 희망하게 함으로써 미래를 열어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