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수사
- 위치(location)의 탁월함 - 청수의 무대에서 시가를 내려볼 때 비쳐지는 석양의 금가루
- 청수의 무대 - 벼랑의 가파름을 역으로 이용하여 못을 사용하지 않은 139개의 기둥이 떠받치는 넓은 무대를 설치하여 본당을 남향으로 돌려 앉힘
역사
히가시야마 36봉 중 기요미즈산 서쪽 중턱에 있다. 이 산은 맑은 샘물이 있어서 '청수산'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그 샘물이 낙차를 이루어 떨어지면서 소리를 낸다고 해서 오토와산 이라고도 불린다. 청수사는 바로 이 맑은 물이 소리내며 흘러 떨어지는 작은 오토와 폭포 자리에 세워졌다.
청수사를 창건한 사카노우에노 다무라마로 장군은 백제계 도래인의 후손이다. 아스카 시대 백제계 도래인들은 각 성씨마다 독특한 기술과 문명을 가지고 야마토 정부에 종사했다. 문서는 후미씨, 예능은 히라타씨 하는 식이었는데 그 중 군사를 담당한 집안이 사카노우에씨였다.
사카노우에와 연진이라는 승려가 힘을 합쳐 2년 만에 세운 것이 청수사다. 그때 사카노우에의 나이는 22살, 780년이었다.
781년 간무 천황이 즉위하면서 2가지 정국 안정 프로젝트를 실시하였는데, 하나는 수도를 옮기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동북지방에서 일어난 에조족을 토벌하는 '에조 정벌'이었다.
하지만 이 두 가지 프로젝트는 난관에 계속 부딪혔다.
- 수도는 나가오카쿄로 정했다가 해괴한 일이 많이 벌어지면서 794년에 헤이안쿄로 변경하여 천도했다.
- 에조족은 일본 열도 원주민이었는데, 정부의 가혹한 세금과 간섭에 반발하여 난이 일어났다. 788년 5만의 군사가 출동했으나 진압에 실패하고 큰 손실을 입고 돌아왔다.
9년 뒤인 797년 사카노우에가 에조를 징벌하는 정이대장군에 임명되었다(이 호칭은 훗날 막부 시대로 가면 줄여서 '쇼군'이라 불린다)
출정을 준비하면서 전쟁을 승리로 이끌어 줄 것을 소원하며 '십일면천수관음상'을 조성하여 봉안하고 '청수사'라는 현판을 걸었다.
801년 10만대군을 이끌고 출별하여 지금의 이와테현에 이사와성을 축조하고 본격적인 토벌 작전에 들어갔다.
이듬해 에조족의 두 족장이 항복을 하면서 큰 싸움 없이 개선할 수 있었다.
창건 당시 아주 작은 사찰에 불과했던 청수사는 805년에 사카노우에가 개선하고 돌아와 조정에 청을 올려 넓은 사찰 부지를 하사 받고 왕실의 원당 사찰로 삼았다. 이렇게 청수사는 씨사에서 어원사(왕실 원당 사찰)로 격상되었다.
사카노우에의 사후 청수사는 소실과 재건, 파괴와 복원을 거듭했고 오늘의 모습은 에도 1633년에 재건된 것이다.
- 소실하게 된 이유는 승려들 간의 분쟁 때문 (야사카 신사 주지 임명을 놓고 대립하다가 히에이산 승병들이 난입하여 불 지름)
1467년 '오닌의 난' 지방장관으로 임명된 다이묘들의 세력이 커지면서 동군과 서군으로 편이 갈려 전국을 전쟁터로 만들었다. - 이 난 자체는 승패가 없이 끝났지만 이후 일본 열도에 일어난 하극상의 열풍은 힘있는 자가 무력으로 영주가 되는 전국(센고쿠) 시대로 접어들게 된다
- 오다 노부나가는 이때 등장한 대표적인 센고쿠 다이묘다.
- 오닌의 난이 10년간 계속되면서 교토의 고찰은 대부분 피해를 입었고 청수사도 이때 완전히 소실되었다.
이후 승려의 권진-기부를 권함, 능동적인 기부-을 통해 복원되고(이때 범종이 생겨 재건의 성과를 알렸다), 1629년에 불타버린 당탑가람은 에도 막부 3대 쇼군인 도쿠가와 이에미쓰에 의해 복구되었다.
답사
어느 때 가든 청수사 답사의 핵심은 청수의 무대가 있는 본당이다.
청수사로 오르는 비탈길을 기요미즈 자카라고 한다.
비탈킬이 끝나는 지점에 있는 돌계단 위로 우뚝 솟은 인왕문부터가 청수사의 경내다.
인왕문에 오르면 높직한 돌계단 위의 서문과 삼중탑이 겹쳐 보인다.
매표소에서 표를 끊고 들어가면 개산당이 보인다. 여기에는 사카노우에를 비롯한 인물들의 목조 초상조각이 있다. (원칙적으로 비공개)
청수의 무대로 들어가기 전에 왼편에 성취원(국가명승)이라는 예쁜 정원이 있다.
개산당 바로 앞의 굉문이라는 작은 문을 통해 회랑으로 연결되어 본당과 청수의 무대로 인도한다.
청수의 무대는 많은 참배객을 수용하기 위하여 본당의 앞을 넓힌 것으로 실제로 가무 공연이 이루어졌다고 한다.
청수의 무대를 돌아나오는 길에 받침 기둥과 삼중탑을 한 컷에 담을 수 있는 포토스팟이 있다.
이후 곧게 뻗은 길을 따라 산자락으로 돌아가면 길이 둘로 갈린다. 하나는 자안탑(순산 기도하는 걸로 유명한 곳)으로 가는 길이고 또 하나는 다시 서문으로 돌아나가는 길이다.
서문으로 돌아나가는 아랫길로 들어서면 청수사의 기원이 된 소리 샘물이 떨어지는 오토와 폭포와 만난다.
- 세 물줄기는 각각 지혜, 연애, 장수를 상징하는데 그 중 두가지만 선택해야지 욕심을 내어 셋을 다 마시면 불운이 따른다는 속설이 있다.
오토와 폭포를 돌아서면 청수의 무대를 받치고 있는 나무 기둥들이 눈앞에 나타난다. 나무는 느티나무이고 긴 것은 12미터나 된다. 기둥은 평균 둘레 2.4미터의 16각형이다.
청수사 답사는 여기서 끝난다.
기요미즈 자카, 산넨 자카, 마치나미
청수사 답사를 마치면 기요미즈 자카를 내려오면서 일본인들의 생활문화를 엿보는 답사의 또 다른 즐거움이 시작된다.
- 도자기, 부채, 염색 비단, 인형, 문방구 등 갖가지 교토 특산품을 파는 작고 오래된 상점들이 줄지어 있다.
- 화과자, 당고, 단팥죽, 모찌를 사먹을 수 있다.
- 교토의 가장 번화한 시조-가와라마치나 기온 거리보다도 여기가 훨씬 볼거리도 많고 물건 값도 싸며 재미있다.
이 길은 산넨 자카, 니넨 자카, 야사카로 이어지며 가다보면 법관사 오중탑, 고대사를 거쳐 야사카 신사에 다다른다. 이 거리는 관과 민이 힘을 합쳐 조성한 것으로, 초기 차를 마시는 집들을 위주로 구성되었다가 이후 발전하였으나 오래된 노포가 그대로 남아있다. 일본에선 오래된 전문 상점을 노포라 쓰고 '시니세'라 읽는데, 그냥 오래된 것이 아니라 한 자리에서 4대,5대를 이어가며 집안의 전통을 이어가는 전문 상점을 말한다.
기요미즈 자카를 조금 내려가면 왼쪽에 대표적인 시니세인 '시치미야 노포'가 나온다. 여기서 꺾으면 가파른 비탈길이 나오는데 이 길을 산넨 자카라고 하며 한자로 '산영판' 또는 '삼년판'이라고 쓴다.
- 순산을 기원하기 위해 청수사 자안탑에 오르던 고개라는 뜻
- 이 비탈에서 넘어지면 수명이 3년씩 줄어든다든 속설이 있다-조심해서 걸으라는 뜻
이 길에 이어져 있는 오래된 집들의 동네를 '마치나미'라고 한다.
1970년대 관광객이 몰려들면서 지역민들이 마치나미를 지키기 위한 모임을 결성했고, 1972년 교토시는 산넨 자카 일대를 '특별보전수경지구'로 지정하는 조례를 정했다. '보전하면서 다듬는다'는 슬기로운 정책이다.
'독서 > 메모'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서사의 위기 (한병철 지음) - 경험의 빈곤 (0) | 2023.12.09 |
---|---|
여행자를 위한 교토 답사기 (유홍순 지음) - 후시미 이나리 신사와 삼십삼간당 (3) | 2023.11.25 |
자유론 2장 - 사상과 토론의 자유에 관하여 (2) (0) | 2023.07.15 |
자유론 2장 - 사상과 토론의 자유에 관하여 (1) (0) | 2023.06.24 |
자유론 - 1장 (2) (0) | 2023.04.0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