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시미 이나리 대사
후시미는 교토의 남쪽에 있다.
헤이안쿄의 남쪽은 9조대로까지였다가 팽창하면서 지금은 10조대로까지 있다. 10조 바깥 동쪽이 후시미구이다.
후시미는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태정대신으로 통치하던 시절 거성인 후시미성이 있는 곳이다.
일본 역사에서 모모야마 시대(1568~1603)라 불리던 시절의 주무대였다.
후시미 이나리 신사는 10조 바로 아래 있기 때문에 9조에 있는 동복사와 아주 가깝고 교토역에서도 가깝다.
JR선 나라선의 첫번째 역이 동복사 역이고 그 다음 정류장이 후시미 이나리역이다. 역에서 내리면 바로 신사의 입구가 나타난다. 후시미 이나리 신사는 일본 전국에 있는 약 4만 2천 이나리 신사의 총본산이다. 이는 일본에 있는 신사의 3분의 1이 넘는 숫자다. 정식 명칭도 신사가 아니라 대사(다이샤)이다.
5세기에 신라에서 건너온 하타씨는 날로 번성하여 인근 지역으로 널리 퍼져나갔는데 6세기에는 지금도 후카쿠사라 불리는 이 지역에 확고히 자리잡고 뛰어난 영농기술로 부를 축적했다.
후시미 이나리 신사는 하타씨의 후손 중 진이려구(하타노 이로구)가 711년에 뒷산인 이나리산 세 봉우리에 신사를 세우고 제사 지내면서 창건한 것이라 한다. '야마시로국 풍토기'에는 이 신사의 창건설화와 이나리의 뜻을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하타씨의 진이려구 공은 벼와 조 등 쌓아둔 곡식이 풍부했다. 그가 떡을 만들어 화살에 꽂아 쏘았더니 떡이 백조가 되어 날아가 산봉우리에 머물렀는데 그곳에서 벼가 나왔다. 이에 신사를 짓고 '이나 나리', 즉 '벼가 되다'라는 뜻으로 이나리 신사라고 이름지었다.
후시미 이나리 신사는 날로 영예를 더해갔고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이곳에서 어머니의 치유를 비는 제를 올려 어머니의 병이 낫자 강력한 지원을 하기도 했다. 여기서 모시는 신은 오곡풍요를 가져오는 농경신이었지만 나중엔 상업 번영(번창)의 신을 모시면서 많은 섭사(딸림 신사)를 두며 더욱 인기를 얻었다.
환상적인 설치미술, 센본토리이
붉게 주칠한 키 큰 도리이 너머로 또 하나의 붉은 도리이가 있다.
넓고 긴 참도를 지나 안쪽 도리이 앞에 서면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5천석을 기부해 지었다는 2층짜리 붉은 누문이 나온다.
돌계단 양옆을 지키고 있는 나무 등롱도 붉게 주칠되어 있고 그 안쪽에 보이는 본전의 기둥들도 주칠이어서 눈이 부실 정도다. 본전은 교토를 불바다로 만든 오닌의 난(1467~77) 때 전소되었지만 1499년 재건되었고, 예술적 가치로 일본의 중요 문화재로 지정되었다.
후시미 이나리 신사에만 있는 장관은 본전 뒤쪽 산비탈에 1천개의 붉은 토리이가 터널을 이루는 '센본토리이'다.
이 도리이 터널은 상업 전영을 기원하며 기진한 붉은 도리이를 두 갈래로 연이어 붙인 것으로 각기 약 70미터나 된다.
이나리산 정상에는 그 옛날의 전설을 간직한 3개의 신사로 오르는 순례길도 있다.
센본토리이를 돌아나오는 반환점에 있는 '오사'라는 섭사에서 출발하면 약 두 시간 정도의 등산질 중간중간 자연림 속에 빛나는 붉은 도리이와 작은 섭사들을 만날 수 있고, 거기서 내려다보면 교토 시내 남쪽이 넓고 멀리 조망되는 아름다운 전망이 있다.
일본의 상징색, 금적색
...전략
일본 근세 성곽의 역사에서 가장 화려했다던 후시미성에서 전투가 벌어졌을 때 장수 이하 2천명이 할복자살했고 그때 낭하(복도)는 핏빛으로 물들었다고 한다. 그런데 더욱 기막힌 얘기는 그 낭하의 나무판들은 삼십삼간당 옆에 있는 양원원(요겐인)과 정전사(쇼덴지)를 지으면서 천장 목재로 사용했고 이는 피의 천장(치텐조)이라는 이름의 명물이 되었다는 것이다.
우리 같으면 당연히 불태워 없애버렸을 그 핏빛을 비장미로 간직하고 있다는 얘기다. 그런 것을 지워버리는 것이 아니라 그대로 안고 살아가는 이들의 정서를 생각하지 않고는 금적색이 상징하는 바를 도저히 읽어낼 수 없다.
삼십삼간당의 천수관음상 1천분
후시미 이나리 신사가 도리이로 장관을 이룬다면, 기온 인근의 삼십삼간당은 불상의 장관이다.
가모강 동쪽 7조대로변에 교토국립박물관이 있고 그 바로 앞이 삼십삼간당이다.
삼십삼간당은 실권을 회복한 고시라카와 상황이 다이라노 기요모리에게 명하여 1165년에 준공한 절이다.
삼십삼간당은 청수사, 금각사와 함께 교토 관광의 빅3 명소이기도 하다.
기둥과 기둥 사이가 33칸이고 건물 길이가 118미터다.
법당에 들어서면 등신대의 천수관음상이 10열 횡대로 사열대 위에 늘어서 있고, 그 수가 1천이다.
똑같은 크기, 똑같은 모양의 이 천수관음상들 키는 등신대(165~168센티)이고, 얼굴은 11면, 팔은 40개이며 손마다 지물을 들고 지그시 눈을 감은 자세로 합장하고 서있다.
연화왕원의 창건
삼십삼간당의 정식 명칭은 연화왕원이다. (연화왕이란 천수관음의 별칭이다)
'법화경'의 '관세음보살 보문품'을 보면 관세음보살은 33가지로 변하여 중생을 구제한다고 했다. 이를 '관음 33변신'이라 했으며, 삼십삼간당의 칸 수는 여기서 유래한 것이다.
이곳을 창건한 고시라카와 상황은 30년간 원정을 펼치면서 두 차례 유폐당했다. 그가 왕권의 강화와 유지를 위해 노력한 여러가지 중 하나가 연화왕원의 창건과 천수관음 1천분이었다. (불교에 대한 광적인 신봉 탓이라기 보단 자신의 위세를 세상에 증명해 보이고 싶은 속마음이 있었던 것이리라..고 해석)
태정대신 다이라노 기요모리는 상황에게 잘 보이기 위하여 송나라와 무역을 해서 도자기 등 진귀한 공예품을 수입해 바쳤다. 이는 일본과 중국이 다시 긴밀히 무역을 하는 일송 무역의 계기가 되었고, 견당사 폐지 이후 막혔던 중국문화가 일본에 쏟아져 들어오는 계기도 되었다. 그때 들어온 대표적인 정신문화가 가마쿠라시대의 선종이다.
가마쿠라시대의 복원
헤이안시대가 막을 내리고 가마쿠라시대로 접어든지 약 60년이 지난 즈음,
1249년 3월 23일 정오 무렵 연화왕원 인근 마을의 불이 나 오중탑에 불이 옮겨 붙었다.
승려들은 삼십삼간당의 불상을 구하기 위해 천수관음상 1천구 중 156구와 28부 중상을 구출하고 중앙에 있는 거대한 장육관음상은 머리와 손 일부만 잘라 나왔다. 그리고 나머지는 전부 불타버리고 말았다. 이때 연화왕원 전체가 다 소실되었다고 한다.
화마를 입은 삼십삼간당은 2년 뒤인 1251년 곧바로 원래의 규모대로 복원 공사에 들어갔다. 그리고 15년 뒤인 1266년에 낙성 공양이 베풀어졌다. 이것이 오늘날의 삼십삼간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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