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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독후감

쇼펜하우어 인생론, A.쇼펜하우어/최현 옮김(범우사)

by revival845 2022. 9. 18.

참고: 도서 링크

 

쇼펜하우어 인생론 - 교보문고

행복한 인생을 위한 쇼펜하우어의 잠언들. 염세철학자라 일컬어지고 있는 저자가 풍부한 인용문과 평이하고 명확한 표현으로 인생의 의의를 설명하고 행복을 가르쳐주는 수필 을 완역한 책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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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석 명절을 맞이해서 처가에 내려가 책장을 훑어보던 중 익숙하면서도 생소한 이름이 쓰인 책을 발견했다.

'쇼펜하우어? 어디서 들어본 것 같은데?'

내가 알고 있는 사람이 맞나 싶어서 첫 장을 넘겨 책 소개를 읽어보니 지난번에 간단히 접하게 되었던 플라톤의 이름이 보였다.

 

쇼펜하우어는 1788년에 독일의 단치히에서 태어난, 염세 사상의 대표적 철학가다. 1809년 이래 괴팅겐 대학, 베를린 대학을 거쳐 ...중략...
그의 철학은 칸트의 인식론에서 출발, 피히테 셀링 헤겔 등 관념론적 철학가를 공격하고 있으나, 그 근본 사상과 체계는 같은 '독일 관념론'에 속한다.
그러나 플라톤의 이데아론 및 인도의 베다 철학의 영향을 받아 염세관을 그 사상적 기조로 한다.
그의 철학은 19세기 후반에 들어 염세관의 사조에 영합, 일시에 보급되었다. 주저로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자연에 있어서의 의지>가 있다.

 

왠지 모를 흥미가 솟았다.

원래 생판 모르는 것일수록 단순한 호기심에 대책 없이 뛰어들고 마는 경우가 있지 않나.

막연한 호기심과 근거 없는 친밀함으로 책을 빌려봐야겠다는 생각을 머릿속에 넣어둔 채,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잊지 않고 책을 챙겨 왔다.

 

결과적으로 책을 끝까지 읽는데 생각보다 많은 노력이 필요했다. 배경으로 알고 있는 것이 부족하다는 것 외에도 힘들게 했던 것은, 짧은 글을 읽고 나면 마음 한편에 저자의 염세적이고 사물을 객관적이다 못해 차갑게 관찰하는 시선이 자리 잡곤 하는 것이었다. 이해하기 어려운 글이 의미하는 바를 씹어 삼키며 헤아리고 나면 그 내용이 어렴풋하게 남아 일상을 보내는 동안 내 머릿속을 맴돌며 자신의 사상이 옳음을 주장하는 것 같았다. 마치 고약한 할아버지가 거침없이 내뱉는 쓴소리를 듣고 나면 처음에는 기분이 나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곱씹으면서 반박하기도 하고 수긍하기도 하는 것 같달까.

 

책의 서문에 소개되어있는 바대로, 책에는 13개의 에세이와 1개의 자전 글(자신의 반생을 정리한 이력서)로 구성되어있다. 13개의 에세이는 각각 삶의 괴로움, 허무, 살려는 의지, 사랑의 형이상학 등의 주제를 중심으로 짧게는 5-6 페이지, 길게는 수십 페이지로 적어낸 글이다.

 

이 책은 당시에 독일 철학의 주류가 되었던 헤겔 철학으로 인해 학계와 일반인들에게 외면당했던 그의 인식론을 흥미와 충격으로 주목받게 하는데 영향을 끼쳤다고 한다. 에세이 전반이 당시 사회 전반에 자리 잡고 있었을 관념에 대한 신랄한 비판과 더불어 종교, 사회, 정치부터 남녀의 사랑까지 논하는데 아마 적잖은 반발과 비판을 수렴했어야 할 것 같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그의 철학도 그의 사후에 유명해진 탓에 본인은 그러한 반응에 저항할 수고를 하지 않아도 괜찮았을 것 같지만, 본인도 본인의 철학이 사람들에게 순탄하게 받아들여질 것이라 생각하진 않은 것 같다.

 

쇼펜하우어는 자기의 철학에 대해 이렇게 말하고 있다.
"철학자가 공적인 입장이나 또는 사적인 처지에서 완전히 도구로 사용되어 온 지가 꽤 오래되었지만 나는 그러한 장해를 받지 않고 30년 이상이나 나의 사상의 길을 걸어왔다. 그것은 다만 본능적인 충동에서 그렇게 밖에는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한 인간이 확신을 갖고 진실을 생각하고 숨어 있는 빛을 밝게 드러내는 것은 반드시 언젠가는 어떤 지각 있는 사람이 알게 되어 그를 움직이고 기쁨을 느끼게 하며 마음의 평안을 줄 것을 믿어 왔다. 나의 저작은 정직과 공명을 이마에 써 붙이고 쓴 것이므로, 칸트 이후 유명해진 궤변가 세 사람의 저작과는 전혀 다르다. 나의 입장은 언제나 사려 즉 이성에 따르고 정직한 말로 일관되어 있으며 지적 직관이니 절대 사유니 하는 허풍이나 사기와 같은 인스프레이션의 입장에 서 있지 않다. 나는 언제나 그러한 정신으로 탐구했으나 한편으로는 거짓과 사악이 널리 퍼지고 허풍(피히테와 셀렁)이나 사기(혜겔)가 크게 존경받는 것을 보고 현대인의 갈채를 단념했다. 현대는 이 20년 동안 그 정신적 괴물인 혜겔을 최대 철학자로서 떠받들어 그 소리는 전 유럽에 울려 퍼지고 있다. 아마도 현대에는 사람에게 줄 월계관은 남아 있지 않을 것이다. 찬미를 음매 한 시대의 비난은 조금도 두려울 것이 없다."

 

용기라고 불러야 할까, 주목받지 못해 비뚤어지고 굳어진 상처라고 해야 할까. 만약 본인이 듣는다면 자신의 철학이 결단코 세상의 주목을 받고자 쓰인 것이 아니고 철저한 사유의 결과라고 강학 이야기할 것 같지만 왠지 모를 아픔이 묻어나는 것은 어찌할 수 없다. 옳고 그름과 찬성과 반대, 찬양과 비판을 떠나 그의 에세이를 읽으며 어떤 부분은 '이렇게 생각할 수 있구나' 하고 감탄하기도 하고, 어떤 곳은 너무 극단적이고 치우친 시각이 아닌가 싶기도 했으나.. 나중에 그의 대표 저서를 접하게 되면 좀 더 사심 없이 그 철학 세계를 탐구할 수 있으리라 하는 기대와 생각으로 감상을 마무리하고자 한다. 책을 읽으며 시종 많은 내용을 발췌하진 못했으나, 일부 주목하게 되었던 글귀를 첨부한다.

삶의 괴로움에 대하여

궁핍은 하류층의 끊임없는 채찍이며 권태는 상류층의 채찍이다. 그리고 일상생활에서는 일요일은 권태를 대표하고 나머지 6일은 궁핍을 대표한다.
우리는 욕구와 소망은 갈증의 경우처럼 느끼지만 바라던 것을 실제로 손에 넣게 되면 그것의 매력은 갑자기 사라져 버린다. 마치 입안에 들어 있는 음식물은 삼키자마자 아무 맛도 느끼지 못하게 되는 것과 같다.
이 권태는 자연이 준 본능에 따라 살고 있는 동물에게서는 찾아볼 수 없으며 ---인간의 손에 의해 훈련된 가장 영리한 동물들이 약간 경험할 수 있을 정도이다---인간에게는 그 권태가 마치 채찍과 같은 것으로 그것에 얻어맞는 자들은 두뇌가 아니라 호주머니를 살찌게 하는 데만 골몰하는 속인들이다. 그들은 안락한 삶을 누리게 되면 그 삶 자체가 일종의 형벌이 되어 권태의 채찍에 시달리게 되므로, 여기에 벗어나려고 여기저기 명승지를 찾아 여행이라도 다니면서 세월을 보내는데 그 모습은 한 곳에서 다른 곳을 찾아 구걸을 다니는 거지와 다를 바 없다.

삶의 허무에 대하여

시간은 우리의 머릿속에 있는 하나의 틀(찍)이며 이것이 있기 때문에 사물과 우리 자신의 공허한 존재가 지속되며 실재라는 가면을 쓰고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우리가 지난날에 이러저러한 행운과 쾌락을 놓쳐 버린 것을 한탄하는 것은 가장 미련한 짓이다. 설사 그 행운이라는 것을 손에 넣었다고 하더라도 지금에 와서 무엇이 남아 있겠는가 기억 속에 오직 팅 빈 미이라가 남을 것이 아닌가. 우리에게 주어지는 모든 것은 다 이렇게 되어 버리는 것이다. 시간에 대한 인식은 우리로 하여금 세상의 모든 사물이 허망하다는 것을 깨닫게 한다.
그래서 궁핍을 제거하면 또 권태에 사로 잡히게 되는(동물도 지능이 발달된 것은 그렇다) 것은 삶이 조금도 진실하고 순수한 내용을 지니고 있지 않으며 오직 요구와 환상의 미혹에 의해 움직이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삶의 움직임이 조금이라도 정지되면 생존이 공허하기 짝이 없다는 것을 절실히 느끼게 된다. 일찍이 현재의 자기 처지를 정말 행복하다고 느낀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다 만일 그런 사람이 있었다면 그는 술에 취해 있었을 것이다.

사랑의 형이상학

그러므로 처음부터 아름다운 이성을 찾지 않는 사람은 없는데 이것은 다름이 아니라 바로 아름다운 이성은 종족의 가장 순수하고 단정한 형태를 나타내고 있기 때문이다. 다음으로 인간은 주로 자기에게 결핍된 특질을 구하며, 때에 따라서는 자기의 결함과 정반대 되는 결함을 상대방에게서 찾아내고 아름답게 보기도 한다. 가령 키가 작은 남자는 키 큰 여자를 좋아하고 피부가 흰 사람은 피부가 검은 상대를 좋아한다.

 

 

읽는 게 다소 힘들었지만, 나름 재미있게 잘 읽었습니다.